ESG 보험료
탄소 중립 공약과 실제 생산 원가 괴리 속에서 조직 내 이해 충돌에 직면한 환경경영팀 부사장의 도덕적 선택
아침 여섯 시 삼십 분이면 박무석은 이미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그것은 습관이 아니라 의식에 가까웠다. 삼십오 년 전 처음 이 건물에 발을 들였을 때도 그랬고, 오십이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코끝에 닿는 냄새 — 낡은 종이와 서버실 냉각 바람이 뒤섞인 특유의 냄새 — 는 어떤 커피보다 그를 또렷하게 깨웠다. 그것도 이제 곧 못 맡게 될 냄새라고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아 조간 시황을 펼쳤다. 손으로 훑는 종이 촉감을 좋아했다. 요즘 후배들은 저마다 태블릿을 들고 다니고, 데스크 위엔 듀얼 모니터가 가득하지만, 박무석은 출근하면 제일 먼저 A4 용지에 인쇄된 전날 종가 목록을 폈다. 손가락 끝에 닿을 때 뭔가 실재하는 것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숫자는 데이터가 아니라 질감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믿어왔다.
오늘 아침, 책상 한쪽에 A4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인사팀 직인이 찍혀 있었다. 열어보지 않아도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았다. 한 달 전에 이미 통보를 받았으니까. 명예퇴직 신청서. 자필 서명 한 줄이면 끝나는 일이었다. 오십이 년이라는 세월이 그 서류 안에서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무석은 봉투를 서랍 속으로 밀어넣었다. 오늘은 아니다.
창밖으로 여의도 한강이 보였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강물은 납빛이었다. 저 강물이 저렇게 흐르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주문을 처리했는지 세어본 적이 없었다. 수만 건인지 수십만 건인지. 세어봤자 의미가 없었다. 숫자는 기억이 아니니까. 기억은 항상 사람이었다.
그는 커피를 끓였다. 인스턴트 봉지 커피였다. 후배들은 캡슐 머신을 쓰거나 근처 카페를 이용하지만, 박무석은 수십 년째 같은 방식이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천천히 저을 때 피어오르는 연기가 하루의 시작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것이 익숙했다. 익숙함은 강함의 한 형태라고, 그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오전 아홉 시 정각, 전화가 울렸다.
“박 부장님이시죠? 저 오정민입니다.”
박무석은 발신 번호를 확인하고 나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서울 지역번호로 시작하는 번호, 자신이 삼 년째 저장해 놓은 이름. 오정민. 고객 관리 파일 속 코드가 아니라, 구체적인 목소리와 표정이 먼저 떠올랐다. 육십이 세. 제지업계에서 은퇴한 지 삼 년째. 부인이 두 해 전에 세상을 떠나고 나서 투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혼자 배우겠다고 이것저것 건드리다가 지인 소개로 자신한테 연결된 경우였다.
“오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안 그래도 어제부터 전화를 드릴까 고민했어요. 선앤홀드보험 말씀이에요. 어제도 하락했더라고요. 제가 잘못 들어간 건지 싶어서요.”
선앤홀드보험, SNHL. 지방 중소형 보험사였다. 오정민이 처음 이 종목을 입에 올린 게 넉 달 전이었다. 당시엔 박무석도 신중했다. 유동성이 얇고, 이익 개선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가격 움직임이 불규칙한 종목이었다. 거래량이 적은 날엔 단 몇 건의 매도만으로도 종가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오정민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셨어요. 오래 병원을 다니셨는데, 그 비용을 그 회사 보험으로 댔거든요. 물론 그때 이름이 지금 선앤홀드보험인지는 모르겠는데, 합병하면서 이어진 거라고 하더라고요. 요즘 보면 아무도 이 회사를 쳐다보지 않잖아요. 그게 왜 그런지 이해가 안 돼서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박무석은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숫자를 들이밀지도 않았다. 대신 한 가지만 물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으십니까?”
“죽을 때까지요.”
오정민은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지만, 전화 너머로도 느껴지는 표정이 있었다. 웃음 뒤에 진심. 박무석은 그 뉘앙스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오십이 년의 경험이 준 것이었다. 리포트가 가르쳐주지 않는 것.
그날 이후로 그는 매주 한 번씩 SNHL 실적 자료를 훑었다. 올해 2분기 보고서를 보면, 손해율이 석 분기 연속으로 소폭 개선되고 있었다. 사업비율도 전년 동기 대비 1.2포인트 낮아졌다. 시장은 여전히 무관심했지만 숫자는 조금씩, 조용히 달라지고 있었다.
“어제 하락은 외인 매물이 나온 겁니다. 뉴스는 없었어요. 실적 방향은 아직 유지되고 있고요.”
“그럼 더 살까요?”
“그건 오 선생님이 결정하실 일입니다.”
“왜 항상 그러세요.” 오정민이 웃었다. “박 부장님은 의견을 안 주시더라고요. 다른 데서는 사야 한다, 팔아야 한다 다 얘기해주던데.”
“의견은 드렸죠. 숫자로요.”
전화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박무석은 기다렸다. 고객이 침묵할 때 끼어드는 건 좋은 브로커의 일이 아니었다. 그 침묵 속에서 결정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오백만 원어치 추가 매수해 주세요. 단가 맞춰서요.”
“알겠습니다. 오늘 중으로 처리하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박 부장님.”
전화를 끊고 나서 박무석은 주문을 넣기 전 잠깐 멈췄다. 오정민이 SNHL을 처음 언급했을 때 자신이 뭐라고 했었나. 유동성 리스크를 설명했다. 소형주의 변동성을 얘기했다. 손실 가능성도 경고했다. 그리고 오정민은 그것을 다 들은 뒤에도 같은 말을 했다. 죽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그 기다림이 어떤 무게인지, 박무석은 알고 있었다. 자신도 오십이 년 동안 기다렸으니까. 무엇을 기다렸는지는 몰랐지만.
주문을 넣은 뒤, 박무석은 창가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거래소가 완전 자동화된 건 이미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달랐다. 매매 창구에 사람이 있었다. 종이 주문서가 있었다. 체결됐다는 신호는 기계음이 아니라 직원이 전화로 알려주는 목소리였다. 오전 장이 끝나면 플로어에서 체결 확인서가 넘어왔다. 종이가 바닥에 흩어지고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란이 시장이었다.
지금 거래소 플로어에는 사람이 없다. 시세는 알고리즘이 만들고, 주문은 밀리초 단위로 처리된다. 스마트폰 앱에서 고객이 직접 주문을 넣으면 브로커를 거칠 필요도 없다. 박무석 같은 사람의 자리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의미는 조용히,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바뀌어 있었다.
처음 자동화가 본격화됐을 때, 그는 서운함을 느꼈다. 그 다음엔 분노가 있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고. 오십 년을 이 일에 바쳤는데, 기계가 0.001초 만에 해치우는 일을 내가 하루 종일 하고 있었다는 뜻이냐고.
하지만 지금은, 글쎄.
지금은 다른 것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고객 파일을 열면 숫자가 있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다. 오정민의 경우처럼. 아버지 치료비. 세상을 뜬 아내. 은퇴 후 혼자 남겨진 시간들. 보험증서 한 장이 바꿔놓은 어린 시절의 어느 하루. 알고리즘은 그런 것을 모른다. 알 이유도 없다. 주문서 항목에 그런 칸은 없으니까.
박무석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식어 있었다. 상관없었다.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어서 오정민에게서 문자가 왔다.
“체결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된 거 맞죠?”
박무석은 잠시 생각했다. 잘 됐냐고. 오전 체결 단가는 어제 종가보다 2.1퍼센트 낮게 들어갔다. 그건 나쁘지 않았다. 장 초반 매도세가 잠깐 강해진 타이밍을 이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SNHL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는 답장을 보냈다.
“단가는 어제 종가 대비 2.1퍼센트 낮게 체결됐습니다. 실적 방향은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잠시 뒤 오정민에게서 답이 왔다.
“박 부장님은 항상 딱 필요한 말씀만 해주시더라고요. 그게 참 좋아요. 다른 데서는 이건 대박 납니다, 반드시 오릅니다 이런 말을 듣다가 이쪽 오니까 훨씬 마음이 편해요.”
박무석은 그 문장을 한번 되씹었다. 자신은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오정민한테는 그게 다르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숫자가 아니라 안심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몰랐다. 감사합니다는 어색하고, 당연한 일입니다는 거만하게 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어쩌면 그게 맞는 답이었다.
퇴근 무렵, 사무실에 불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후배들이 가방을 들고 나갔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고 눈빛만 교환하고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다. 박무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전엔 퇴근할 때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지금은 그런 문화가 없다. 나쁜 건 아니다. 그냥 달라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SNHL 현황을 확인했다. 종가는 오전 체결 단가보다 1.4퍼센트 올라서 마감됐다. 하루 기준으로는 의미 없는 숫자였다. 오정민이 기다리는 시간 단위는 하루가 아니니까. 하지만 오늘은 나쁘지 않은 하루로 끝났다.
파일을 닫았다. 그리고 서랍을 열었다.
인사팀 봉투.
박무석은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외우고 있었다. 서명란 위쪽에 퇴직 예정일 기재 칸이 있고, 그 아래 담당자 확인 도장 자리가 있다. 맨 하단에 신청인 서명. 만년필로 이름 석 자만 쓰면 된다.
그는 서명란을 잠깐 바라보다가 봉투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만년필 뚜껑은 열지 않았다.
내일 또 아침 여섯 시 삼십 분에 여기 와서 커피를 끓이고 시황을 펼칠 것이다. SNHL 실적 발표가 아직 남아 있고, 오정민의 투자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동안 자신의 이야기도 아직 닫히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합리적인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정민이 아버지의 오랜 보험사를 끝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을 때도, 그게 합리적인 이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기다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
알고리즘은 그걸 모른다.
아직은.
창밖 한강은 어둠 속에서도 흐르고 있었다. 아침에 납빛이었던 강물이 이제 먹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색만 바뀌었다. 방향은 같았다.
박무석은 불을 껐다.
본 글은 허구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