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의 유령
사라진 암호화폐 거래소 회장을 찾아 글로벌 추적을 벌이는 형사의 72시간
0시간, 서울
이강민이 모니터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이버수사대 형사로 11년, 그는 화면 너머의 세계가 현실보다 훨씬 더 차갑다는 것을 알았다.
새벽 2시 17분. 금융정보분석원에서 긴급 신호가 들어왔다.
“코어넥스 거래소 한세준 회장. 오늘 오후 11시 이후 연락 두절. 거래소 콜드월렛 대규모 이체 감지.”
이강민은 의자를 당겼다.
화면에 숫자들이 흘렀다. 2,340억 원. 고객 예치금이 블록체인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한 주소에서 다른 주소로, 조각나면서, 섞이면서.
“72시간.” 팀장이 말했다. “자금 세탁 완료까지 추정 시간이야.”
12시간, 블록체인 위에서
블록체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모든 이체가 기록되고, 그 기록은 삭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보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강민은 온체인 분석 소프트웨어를 돌렸다. 자금은 열두 개 주소로 쪼개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믹싱 서비스였다.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여기.” 옆에 앉은 사이버수사대 박지현이 화면을 가리켰다. “이 주소, 한 달 전에 한 번 나왔어. 태국 거래소 계좌랑 연결됐어.”
이강민은 메모를 적었다.
태국. 범죄인인도조약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절차는 느렸다. 느린 것은 없는 것과 같았다.
24시간, 인천공항
CCTV 영상은 선명했다. 한세준은 혼자였다. 짐은 작은 캐리어 하나. 출국 시각 오후 11시 42분, 방콕행 직항.
이강민은 여권을 쥐었다.
인터폴 적색수배 발령까지는 여섯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 여섯 시간 동안 한세준은 방콕에서 다른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먼저 간다.”
팀장이 말렸다. 이강민은 이미 카운터를 향해 걷고 있었다.
36시간, 방콕
방콕은 습했다. 습기가 셔츠에 달라붙었다.
이강민은 현지 경찰의 통역 없이 혼자 움직였다. 공식 협조 채널은 48시간이 걸렸다. 그에게는 36시간밖에 없었다.
온체인 분석이 가리킨 주소는 수쿰빗 거리의 한 환전소였다. 간판도 없는 곳. 창문에 가상화폐 로고만 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태국인 한 명이 카운터 뒤에서 쳐다봤다.
“어제 밤에 한국 사람 왔지요?”
상대방은 고개를 저었다.
이강민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블록체인 트랜잭션 기록을 보여줬다. 이 환전소의 지갑 주소로 들어온 거래가 열여섯 개. 어젯밤 새벽 3시 사이에.
“당신 가게가 여기 있어요.”
상대방의 눈이 흔들렸다.
52시간, 파타야
환전소 주인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한세준은 파타야에 있었다. 해변에서 차로 20분 거리의 콘도. 현금으로 계약된 단기 임대.
이강민은 렌터카를 몰았다. 고속도로에서 가속 페달을 밟았다. 미터기가 140을 넘었다.
인터폴 협조 요청이 들어왔다는 문자가 울렸다. 태국 경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경찰이 먼저 도착하면 사건은 외교 채널로 넘어갔다. 거기서부터는 형사의 일이 아니었다.
60시간, 파타야 해변
콘도 로비에서 한세준을 마주쳤다.
그는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강민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빠르네요.”
이강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잡아도 소용없어요.” 한세준이 말을 이었다. “자금은 이미 열두 개 지갑으로 갈라졌고, 각각 다른 나라 거래소에 있어요. 국제 공조로 동결하려면 최소 여섯 달이 걸려요.”
“알아요.” 이강민이 말했다.
“그럼 왜—”
“당신 얼굴을 보려고.”
한세준의 웃음이 사라졌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파타야 해변의 파도 소리 위로,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72시간, 서울 사무실
이강민은 보고서를 썼다.
자금 회수 전망: 불투명. 블록체인 분석 기업들의 집계에 따르면, 믹싱 서비스를 세 단계 이상 거친 자금의 실질 회수율은 역대 한 자릿수 퍼센트에 머물렀다. 2,340억 원 중 고객에게 돌아갈 금액이 얼마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한세준은 태국 경찰에 인계됐다. 범죄인인도 절차는 시작됐다. 얼마나 걸릴지는 미지수였다.
이강민은 모니터를 껐다.
블록체인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기억한다는 것이 되찾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것은 형사의 일도, 블록체인의 일도 아닌, 더 긴 시간의 문제였다.
창밖에 서울의 아침이 오고 있었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