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러: 기계가 배우다
필리핀 BPO 센터에서 AI 모델을 위해 이미지에 라벨을 붙이는 청년들. 자신들이 훈련하는 기계가 자신들을 대체하는 순간까지.
새벽 두 시, 마닐라 외곽의 센터 3층. 에어컨은 늘 너무 차고, 모니터는 늘 너무 밝다. 나는 오늘도 횡단보도 사진 400장에 네모를 그린다. 보행자, 자전거, 오토바이, 짐수레. 한 장에 평균 11초. 시급은 한국 돈으로 이천 원이 조금 안 된다. 그래도 이 월급은 우리 동네에서 괜찮은 편이다.
내 이름은 미구엘이다. 스물셋이고, 동생 둘의 학비를 낸다. 회사 이름은 아라야 데이터웍스, 우리가 일을 대 주는 곳은 바다 건너 어딘가의 “고객사”다. 고객사 이름은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 계약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작업 번호와 정확도 점수뿐이다.
내 점수는 98.4다. 팀에서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옆자리의 리나인데, 그녀는 점수를 볼 때마다 웃지 않는다. 점수가 높으면 더 어려운 작업이 배당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비 오는 밤의 흐린 유리창, 반쯤 가려진 얼굴, 쓰러진 오토바이와 사람이 겹친 사진 같은 것들.
석 달 전부터 화면 한쪽에 작은 상자가 생겼다. “모델 제안”이라는 이름이다. 내가 네모를 그리기 전에 기계가 먼저 네모를 그려 둔다. 처음에는 틀린 것이 많았다. 우산을 사람으로 잡고, 그림자를 자전거로 잡았다. 나는 그것을 고쳤고, 고치는 일이 곧 내 일이었다. 기계는 내가 고친 자리를 기억했다.
팀장 에르난은 그 상자를 “보조”라고 불렀다. 우리가 덜 힘들어질 거라고 했다. 실제로 덜 힘들어졌다. 한 장에 11초이던 것이 6초가 됐다. 그런데 하루 할당량은 그만큼 늘었다. 6초에 한 장, 한 시간에 육백 장. 나는 눈을 감아도 네모가 보인다.
어느 밤 리나가 내 모니터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오늘 네가 고친 거, 몇 개야?”
나는 세어 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가 대시보드를 열어 보여 주었다. 월요일에 한 장당 평균 3.1곳을 고쳤는데 오늘은 0.4곳이다. 나는 그 숫자를 한참 보았다. 틀린 곳이 줄었다는 것은 기계가 배웠다는 뜻이고, 기계가 배웠다는 것은 내가 가르쳤다는 뜻이다.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계속 돌았는데, 자랑스러운 것인지 서러운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음 주에 에르난이 우리를 회의실로 불렀다. 새 작업 유형이 열린다고 했다. “검수 전담.” 기계가 그린 네모를 사람이 눈으로만 훑고 승인하는 일이다. 시급은 조금 낮고, 필요한 인원은 지금의 절반이다. 지원서는 금요일까지 내라고 했다. 누가 남을지는 점수로 정한다고 했다.
회의실을 나오며 리나가 말했다. “우리 점수가 기계 학습 데이터잖아. 우리가 잘할수록 기계가 우리 몫을 더 잘 가져가.”
“그럼 일부러 틀릴까?”
내가 묻자 그녀가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틀리면 재교육이고, 재교육은 무급이야.”
그날 밤 나는 평소처럼 자리에 앉았다. 횡단보도 사진이 떴다. 기계가 먼저 네모를 그려 놓았고 이번에는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보행자 셋, 자전거 하나, 짐수레 하나. 맨 구석에서 한 아이가 우산을 쓰고 서 있는데, 기계는 그 아이를 정확히 ‘아이’라고 불렀다. 내가 지난 석 달간 몇백 번 고쳐 준 바로 그 구분이다.
승인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려놓는다. 6초가 지난다. 7초, 8초. 화면 아래에서 타이머가 조용히 올라가고, 타이머 옆에 내 점수가 떠 있다. 98.4.
나는 아직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기업·단체는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것이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