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성의 주문
시장 혼란 속에서 잊혀진 정크본드가 신비로운 힘을 발휘하며 수조 달러의 동결된 신용을 해제하고 금융 시스템을 구하는 이야기
그것은 오래된 서류 더미 속에 있었다.
서울 여의도 어딘가의 자산운용사 포트폴리오 — 이름도 생소한 CRDT 채권 — 은 2018년 발행 이후 단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한 채 시스템 구석에 묻혀 있었다. 수익률은 연 9.3퍼센트. 신용등급은 B마이너스. 업계 용어로는 정크본드, 쓰레기 채권이었다.
펀드매니저들은 그것을 “실수”라 불렀다. 2020년 3월이 오기 전까지는.
3월의 시장은 균열로 시작했다. 아니, 균열이 아니었다 — 땅 자체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회사채 시장은 하룻밤 사이에 얼어붙었다. 투자등급 회사채 스프레드는 370베이시스포인트를 넘었고, 하이일드 스프레드는 1,100베이시스포인트를 돌파했다. 숫자로는 냉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 돈이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멈췄다.
기업들은 돈을 빌리려 했지만 시장의 문은 닫혀 있었다. 은행들은 서로를 믿지 못했다. 채권 딜러들은 매수 호가를 내놓지 않았다. 수조 달러에 달하는 크레딧이 눈앞에서 동결됐다.
그 안에서 CRDT 채권은 이상하게도 흔들리지 않았다.
채권이란 원래 약속이다. 누군가 “나는 이 돈을 갚겠다”라고 서명한 종이 한 장. 그러나 CRDT는 그보다 오래된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마치 수없이 파산과 구제를 겪은 존재처럼 — 두려움이 아닌 오래된 피로함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펀드매니저 이준하는 3월 20일 새벽 두 시에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포트폴리오 전체가 붉은색이었다. 그는 화면을 스크롤하다가 멈췄다. 정크본드 섹션에서 유일하게 녹색 불을 깜빡이는 것이 있었다. CRDT였다.
“이게 왜…”
거래 내역을 열었다. 3월 들어 CRDT를 사들인 것은 그가 아니었다. 이름이 흐릿하게 가려진 어떤 외국 기관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매수하고 있었다. 미세한 거래들. 마치 누군가 조용히 불씨를 지키는 것처럼.
3월 23일,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선언했다.
회사채를 직접 매입하겠다고.
연준이 하이일드 채권, 정크본드를 매입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다. 중앙은행이 쓰레기 채권의 이름을 입으로 부른 최초의 순간. 그 선언과 함께 수조 달러의 얼음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크레딧 스프레드가 수직으로 꺾였다. 기업들이 다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채권 시장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숨을 쉬었다.
그 선언이 나오기 72시간 전, 이준하의 포트폴리오 안에서 CRDT는 이미 조금씩 유동성을 회복하고 있었다. 미미한 수치였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 얼음 아래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처럼.
이준하는 나중에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상한 채권이야. 아무도 안 사줄 때 오히려 더 단단해진 것 같아.”
유동성은 마법이다. 존재하면 당연하게 여기고, 사라지면 세계가 무너진다. 2020년 봄의 크레딧 시장은 그 진실을 날 것으로 보여줬다. 연준의 개입이 없었다면, 수천 개의 기업이 단지 돈이 돌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을 닫았을 것이다.
CRDT 채권은 그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단 하나의 각주였다. 누구도 그것의 역할을 증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얼음이 가장 먼저 녹기 시작한 지점 — 그 미세한 균열의 시작점 — 이 어디였는지를, 이준하는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는 그 이후로도 채권을 팔지 않았다. 수익률이 충분히 올랐을 때도, 주변에서 차익 실현을 권유할 때도.
“왜 안 파느냐”는 질문에 그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가끔은 이유를 모르는 것들이 먼저 움직여.”
그 채권은 지금도 어떤 포트폴리오 안에 있다. 아마 누군가의 엑셀 시트 맨 아래 줄에. 등급은 여전히 B마이너스다.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하지만 그것은 알고 있다 — 세상이 다시 얼어붙는 날, 가장 먼저 녹기 시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무언가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고 있다는 것을.
본 글은 허구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