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7 · Vol. III · No.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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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GLOBAL

아버지의 선택

삼십 년 석유 산업 경력의 아버지와 환경 활동가인 딸. 세상을 보는 각도가 다른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 선택의 무게와 미안함이 교차한다.

· 4분 읽기 · #스토리#로맨스

서울 도심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충남 서산의 정유 콤플렉스는 밤에도 잠들지 않는다. 흰 연기가 플레어 스택 위로 피어오르고, 오렌지빛 불꽃이 하늘 한 귀퉁이를 물들이는 그 광경을 강민준은 삼십 년 동안 바라보았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그 불꽃이 경이로웠다. 지금은 그냥 시계 같다. 아직 돌아가고 있다는 신호.

XOM처럼 규모는 크지 않지만, 민준이 일하는 코리아에너지파트너스는 국내 정제 설비 기준으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그는 이 회사에서 공정기술팀 막내로 시작해 지금은 전략기획본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 명함에는 ‘본부장’이라고 적혀 있지만, 회사 복도에서는 그냥 ‘강 부장’이라고 불렸다. 서른두 해 동안 그래왔다.

딸 수아가 전화를 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민준은 뒤늦게 알아챘다.

“아빠, 듣고 있어?”

“응.”

“내가 뭐라고 했는지 말해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후정의연대 집회. 다음 주 토요일.”

“그것만 들었잖아.”

민준은 차 창문을 내렸다.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도로에서 밤바람이 들어왔다. 수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또렷했다. 무언가 결심한 사람의 목소리.

“아빠 회사 앞에서도 할 거야. 기자들도 올 거고.”

“알았어.”

“알았어, 가 다야?”

“뭘 더 원해?”

전화기 너머에서 긴 숨소리가 들렸다. 수아가 무언가를 참는 소리라는 것을 민준은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다.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을 때 먼저 숨을 골랐다.

“나는 그냥 아빠가 한 번쯤 생각해줬으면 해.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나는 삼십 년째 생각하고 있어.”


민준이 처음 ‘에너지 전환’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2015년 무렵이었다. 파리협정 직후, 사내 세미나에서 누군가 슬라이드를 펼쳤다. 2050년 탄소중립, 재생에너지 비중 80퍼센트.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미소를 지었다. 목표치는 목표치다. 현장은 현장이다. 그것이 그때 그 방의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2025년,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연간 보고서에서 전 세계 태양광·풍력 발전 신규 설비가 화석연료 발전 신규 설비를 처음으로 넘어섰다는 수치를 공식화했다. 숫자는 정확했다. 재생에너지 신규 설비 3,300기가와트 대 화석연료 500기가와트. 육 대 일의 비율. 민준은 그 보고서를 인쇄해서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버리지도, 들고 다니지도 않고.

딸이 그 보고서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다니는 수아는 그런 숫자를 밥 먹듯 인용했다. 그러나 민준이 그 숫자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현실을 더 잘 안다는 오만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체념과 피로가 뒤섞인 감각이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닦아놓은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의 감각.


다음 주 토요일, 민준은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집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토요일은 쉬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전 내내 방 안에 앉아 뉴스 알림을 껐다가 켜기를 반복했다.

오후 두 시쯤, 수아에게서 문자가 왔다.

‘300명 왔어.’

민준은 그 문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저녁에 수아가 집에 들렀다. 현관에서 운동화를 벗으며 민준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민준은 소파에서 TV를 보는 척했다. 뉴스에서는 집회 소식을 짧게 다루고 있었다. 카메라가 잠시 현수막을 비췄다. 코리아에너지파트너스라는 로고가 흐릿하게 보였다.

“봤어?”

수아가 물었다.

“응.”

“기분이 어때?”

민준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모르겠어.”

그것이 진심이었다.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자부심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 안에서 조용히 섞이고 있었다. 삼십 년이라는 시간은 단순하지 않다. 그 안에는 야근도 있고, 동료의 죽음도 있고, 지방 출장에서 혼자 먹은 고깃집 저녁도 있다. 그 시간이 세상을 망가뜨렸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민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이 세상을 움직였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아빠는 후회해?”

수아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물었다. 대화를 이어가려는 것인지, 진짜로 궁금한 것인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후회가 뭔지 잘 모르겠어.”

수아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민준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알아.”

“근데 나쁜 선택이 있잖아. 사람과 별개로.”

민준은 딸을 바라보았다. 수아는 스물여섯이었다. 민준이 그 나이에 서산 플랜트에서 첫 출근을 했을 때, 세상은 지금과 달랐다. 석유가 없으면 도시가 멈추던 시절. 그 시절의 선택이 지금의 기준으로 재단받는 것을 민준은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직 몰랐다.

“수아야.”

“응.”

“너는 그게 선명하게 보여?”

수아는 잠시 생각했다.

“완전히 선명하진 않아. 근데 방향은 보여.”


민준은 그날 밤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책상 서랍에서 그 IEA 보고서를 꺼냈다. 종이가 약간 구겨져 있었다. 재생에너지 신규 설비 3,300기가와트. 수치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어떤 사람에게는 미래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미 지나간 전환점이었다.

민준은 보고서를 덮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보였다. 저 빛 대부분은 아직도 어딘가의 연료가 태워진 결과였다. 플랜트의 불꽃처럼 조용히, 멀리서.

그는 수아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럴 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정돈되지 않은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십 년의 경력은 쉽게 해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딸의 신념도 쉽게 반박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같은 사실을 보고 있었다. 다만 서 있는 자리가 달랐다.

창이 뿌옇게 흐렸다. 민준은 그것이 습기인지 먼지인지 확인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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