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사의 마지막 계약
글로벌 반도체 업계 침체 속에서 20년 간 장비를 설치해온 네덜란드 엔지니어가 한국 공장의 멈춘 기계 앞에서 자신의 삶과 일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얀 페르스트라턴은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덜란드 벨트호번 본사에서 비행기를 열여섯 시간 타고 날아온 그는 지금 경기도 이천의 반도체 공장 2층 유리 복도에 서 있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클린룸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계들은 다 있었다. 다만 움직이지 않았다.
“저 장비들이 내가 설치한 겁니다. 3년 전에.”
그의 옆에 선 공장 담당자 김 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클린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세워진 기계의 이름은 EUV 리소그래피 장비였다. 쉽게 말하면 반도체 위에 회로를 그려 넣는 도구다. 손톱 크기 칩 위에 서울 시내 도로망보다 복잡한 선들을 새기는 작업을 이 기계가 한다. 얀은 20년을 이 장비 하나만 만졌다. ASML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이 기계를. 그는 그 회사의 수석 필드 엔지니어였다.
“언제부터입니까?”
“두 달 전부터 가동률이 30%로 떨어졌습니다. 이번 달부터는 아예 멈췄고요.”
이유는 얀도 알았다. 비행기 안에서 읽은 업계 보고서에 이미 다 나와 있었다. 2025년 말부터 AI 칩 수요가 예상보다 빨리 정점을 찍었다. 데이터센터들이 서버 확장을 멈췄다. 공장들은 이미 수개월치 재고를 쌓아 놓은 상태였다. 어딘가에 거대한 창고가 있고, 그 안에 아직 포장도 안 뜯긴 칩들이 줄지어 앉아 있을 것이었다.
“새 계약은요?”
김 부장이 잠시 침묵했다. “내년까지는 어렵습니다.”
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은 했다. 그래도 직접 들으니 달랐다. 그는 폴더를 옆구리에 끼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클린룸에 들어가려면 방진복을 입어야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는 흰 옷. 눈만 내놓는 고글. 장갑과 덧신. 얀은 이 차림을 20년째 하고 있어서, 이제는 착용 순서가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럽다.
클린룸 안은 바깥보다 조용했다. 멈춰 선 기계들 사이를 걷는 것은 이상하게 묘지를 산책하는 기분을 주었다. 물론 기계들은 죽은 게 아니었다. 전원이 들어와 있고, 내부 온도도 유지되고 있었다. 다만 일을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는 3호 장비 앞에 멈췄다. 자신이 직접 설치한 기계다. 3년 전 이 자리에서 사흘 밤을 새웠다. 광학계 정렬이 계속 틀어졌는데, 원인을 찾다가 먼지 한 점이 레이저 경로에 끼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을 때의 기분을 아직 기억했다. 그 먼지는 지름이 0.3마이크로미터였다. 사람 머리카락의 300분의 1 크기. 그것 하나가 수십억 원짜리 장비를 먹통으로 만들었다.
그때 얀은 기계를 이겼다고 생각했다.
지금 3호기 앞에 서서 그는 그 승리가 무슨 의미였는지 다시 생각했다.
저녁에 김 부장과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갈비탕이었다. 얀은 국물을 조금 마시며 물었다.
“인력은요? 라인 직원들은 어떻게 됩니까?”
“일부는 다른 라인으로 배치하고, 일부는…” 김 부장이 말을 흐렸다. “정리 수순입니다.”
얀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공장 안에서 본 빈 의자들이 떠올랐다. 흰 방진복을 걸어 놓는 옷걸이 칸칸이 비어 있었다. 가동이 멈추면 사람도 멈춘다. 그 순서는 항상 그랬다.
“ASML 장비는 어떻게 할 건지 결정됐습니까?”
“본사에서 재배치 가능한지 검토 중이에요. 동남아 쪽 신규 공장으로 이전하는 방안도 있고요.”
그러니까 기계는 다른 나라로 옮겨질 것이었다. 얀이 3년 전에 설치한 3호기도. 누군가 다시 그 기계를 세팅할 것이다. 얀이 아닌 다른 엔지니어가.
그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가 거기에도 가게 될까. 아니면 나도 이 공장 직원들처럼 어느 순간 배치 없이 멈추게 될까.
그날 밤 호텔에서 얀은 잠을 자지 못했다. 창밖으로 이천 시내 불빛이 보였다. 반도체 공장이 여럿 있는 도시라 그런지 불빛이 특별히 균일했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폴더를 두고 천장을 보았다.
20년 전 첫 출장지는 대만이었다. 당시 ASML 장비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다. 그래도 설치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그때 담당자가 젊은 대만 엔지니어였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은 선명히 남아 있었다. 영어도 서툴고 네덜란드어는 당연히 모르고, 둘이서 도면을 펼쳐 놓고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했다.
장비가 처음 작동했을 때 그 엔지니어가 손을 내밀었다. 얀도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함께 뭔가를 만들었다는 감각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그게 이 일을 계속한 이유였다. 기술이 아니라 그 감각.
이천 공장에서도 3년 전에 그런 순간이 있었다. 새벽 4시, 마침내 장비가 첫 웨이퍼를 정상 처리했을 때 현장 팀장이 박수를 쳤다. 얀도 방진복 장갑을 낀 채 따라 쳤다. 소리가 잘 나지 않는 박수였지만 진짜 박수였다.
그 박수 소리가 지금은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걸까.
다음 날 아침 얀은 다시 공장으로 갔다. 정식 서비스 점검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장비 상태를 기록하고 서명하고 본사에 보내는 서류. 그것이 이번 출장의 공식 목적이었다.
클린룸에 혼자 들어가 3호기 패널을 열었다.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광학계는 깨끗했다. 레이저 출력도 스펙 안이었다. 먼지 한 점 없었다. 기계는 완벽한 상태로 멈춰 있었다.
그는 점검 항목을 하나씩 체크하면서 생각했다. 이 기계는 잘못한 게 없다. 그를 만든 사람들도, 설치한 사람도, 운영한 사람들도 잘못한 게 없다. 세상이 너무 많은 칩을 원한다고 했다가 갑자기 말을 바꾼 것뿐이다. 수요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움직인다. 물처럼, 바람처럼. 붙잡을 수 없다.
보고서 마지막 항목에 서명을 마칠 무렵, 공장 천장에서 환기 팬이 낮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계들이 멈춰 있어도 공기는 계속 순환되고 있었다. 클린룸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얀은 3호기 패널을 닫고 잠금 나사를 조였다.
다음 가동이 내년이든, 2년 후든, 아니면 다른 나라 공장에서든, 이 기계는 그 첫 웨이퍼를 다시 처리할 것이다. 누군가 또 박수를 칠 것이다. 얀이 없는 곳에서도.
그는 클린룸을 나왔다. 방진복을 벗으면서 손가락 관절이 뻐근하다는 것을 처음 알아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얀은 창밖을 보았다. 고속도로 양옆으로 공장 건물들이 계속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어떤 건물은 굴뚝에서 연기가 났고, 어떤 건물은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가동하는 곳과 멈춘 곳이 섞여 있었다.
그는 폴더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 출장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본사에서 연락이 오면 알게 될 것이다.
택시 기사가 라디오 볼륨을 조금 높였다. 뉴스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얀은 그냥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공장 하나가 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본 글은 허구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