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배치의 편지
오래 일해 온 제약 원료 공장의 마지막 생산 배치가 끝나는 날. 은퇴를 앞둔 공정 책임자와 이직을 준비하는 후배가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를 정리한다.
배치 번호는 BK-2847이었다.
오태현은 그 열두 자리를 세 번 소리 없이 읽었다. 반응기 외벽에 붙은 점검 카드에 쓰인 글씨가 그의 것이었다. 삼십일 년 동안 그는 이 공장에서 수천 개의 배치를 열고 닫았다. 마지막이 어떤 번호가 될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2847이라는 숫자는 특별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임수아가 샘플링 튜브를 들고 반응기 쪽으로 걸어왔다. 세 달 뒤 충남의 더 큰 위탁생산 업체로 옮길 예정이었다. 오태현이 그것을 안 것은 그녀가 말하기 전부터였다. 사람이 짐을 싸기 시작하면 발소리가 달라진다.
“온도 맞나요, 선배님?”
“41.3도. 어제랑 같아.”
임수아는 무언가를 적고 클립보드를 옆구리에 끼웠다. 반응기에서는 낮고 고른 소리가 났다. 오태현은 그 소리를 거의 듣지 않는 편이었다. 삼십 년이 지나면 배경 소리가 된다.
이 공장, 미람바이오켐이 문을 닫는 것은 경영진이 갑작스럽게 결정한 일이 아니었다. 사업 재편이라는 이름으로 삼 년을 준비한 절차였다. 소규모 배치 공장들이 줄줄이 정리되는 흐름은 업계 전체에 걸쳐 있었다. 대형 위탁생산사들이 연속 공정 설비를 들이면서, 열두 개씩 반응기를 돌리던 소규모 시설의 단가가 더 이상 맞지 않게 됐다. 오태현은 그 사실을 보고서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연간 생산량이 조금씩 줄고, 신규 설비 발주가 멈추고, 그다음에 보고서가 왔다.
“거기 가면 뭐 만들어요?”
오태현이 먼저 말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말 걸기였다.
“심혈관 쪽 원료요. 아직 품목은 정확히 모르고요.”
“거기 반응기 용량이 크지.”
“네. 여기 열 배는 돼요.”
오태현은 그 말을 듣고 반응기 외벽을 한 번 더 봤다. 용량이 크다는 것은 무엇이든 좋은 일처럼 들린다. 그런데 세상의 대부분의 반응기는 어딘가에서 누군가 이미 써왔던 것이었다. 임수아가 가는 그 큰 반응기도 오래전 누군가가 처음으로 온도를 맞췄을 것이다.
“마지막 샘플 올라오면 오늘 끝나는 거예요?”
“QC 패스 나면. 보통 두 시간.”
임수아는 클립보드를 반응기 선반 위에 올려놓고 창 쪽으로 걸어갔다. 공장 창은 작고 높아서 하늘이 조금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태현은 그 창이 처음 발령받던 날부터 항상 그런 비율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선배님은요. 이후에 뭐 하실 거예요?”
“이후.”
오태현은 그 단어를 한 번 반복했다.
“딱히 없어. 텃밭 있어, 집에. 아내가 늘 혼자 한다고 했는데. 그것 좀 도우려고.”
임수아가 창에서 돌아섰다. 그 얼굴에는 뭔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묻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표정이었다. 오태현은 그 표정도 알고 있었다. 삼십 년이면 사람의 표정도 조금씩 읽히게 된다.
배치 BK-2847의 마지막 반응이 멈춘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반 뒤였다. 샘플은 QC에 올라갔고, 오태현은 점검 카드 하단에 종료 시각을 적었다. 임수아는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었다.
“이 원료, 어디로 가요?”
“유럽 쪽 완제약사. 거기서 항생제로 만들어.”
임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태현도 더 하지 않았다. 반응기의 소리가 완전히 멈추자 공장이 조금 더 넓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착각인 줄 알면서도 그런 느낌이 왔다.
원료는 그날 저녁 출하될 예정이었다. 어떤 사람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막거나 열겠지. 반응기가 멈춘 뒤에도 분자들은 계속 어딘가로 움직인다. 오태현은 그 사실이, 직업 생활 전체에서 위로가 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았다. 임수아가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